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 72시간 환승쇼를 마치고 드디어 도착한 체코 프라하. 공항에 내려 친구가 있는 프라하 시내까지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했다. 무려 유심도 없이! 여기선 길을 잃어버려도 괜찮을 거 같았거든. 위험할 수가 없잖아.
트램을 타고 이동했다. 쾌적하고 편리하고 쉽다.
친구는 프라하 1달 살기를 하고 있었다. 퇴사 후 잠시 휴식을 취하러 여행을 떠났는데, 우연히 다합에서 만나 같이 시간을 보냈다. 이후 각자의 여정을 떠났고, 다시 체코에서 만난 것. 정확히는, 내가 체코로 찾아갔다. 인정하긴 싫지만,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아무 생각, 계획, 걱정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현재는 친구에서 여자친구가 되었다)
체코에서의 나는 한마디로, 애완 인간이었다. 하루 일정 중, 내가 계획한 건 없다. 친구가 어디서 뭘 하고, 뭘 먹고, 어떤 옷을 입을지(?)까지 정해줬다. 나는 유심 값이 아깝다는 핑계로 휴대폰을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친구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편안한 음식. 분명 며칠 전까지는 야생의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의존적인 사람이었나? 이상했다. 내가 아는 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모험적인 사람인데.
편안하다. 예상 밖이다. 이렇게 무탈하게, 마음 맞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행복이구나. 어 그렇다면, 이전까지 내가 알던 나는 뭐였지?
#아프리카 서성구
모험적인 내가 좋았다. 그간 살아왔던 삶을 돌이켜봤을 때,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에, 나는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으니까. ‘책에서 본 아프리카 마을로 떠난다’라는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던 거 같다. 이 얼마나 찬란한 모험인가.
예상보다 일찍 아프리카를 떠났다. 그럼에도, 그 시간 동안 내가 모험가의 모습이었다는 건 확실.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대륙에 혼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로컬 교통수단을 이용해 시골 마을로 찾아갔다. 이 시골마을에서, 모든 걸 나의 힘으로 만들어 나갔다.
길게 거주할 숙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정보가 부족하다. 그래서 일단 단기 숙소를 예약 후, 마을에 직접 가서 발품을 팔았다. 지도에 나오는 숙소를 추린 후, 바로 방문해 방 상태를 확인했다. 심지어 장기 숙박이라는 카드를 내세워 집주인과 가격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건 한국에서도 안 하는 건데. 아프리카 시골에 가난한 여행자라는 모습으로 살아보니까 하게 되더라.
필요한 물품들도 직접 공수했다. 마라톤용 운동화, 운동 후 먹을 보충제, 간단한 의류까지. 현지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두 발로 찾아다녔다. 퀘스트를 하나하나 완료하는 느낌? 그렇지, 역시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나는 여러 명이구나.
나는 누구지? 분명 같은 사람인데 너무 다르다. 의존적인 성구와 모험적인 서성구. 그저 환경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버리는구나.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아프리카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서성구와, 체코에서 친구만 바라보는 성구가 너무 달랐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안다. 나는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여러 명의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이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너무 쉽게 변하는 스스로가 실망스럽기도 했거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되돌아보니, 오히려 좋다. 나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구나. 불편한 것도 좋고, 편한 곳도 좋았으니.
사람은 바뀐다. 한 명이 아니다. 나는 불편한 것도 좋았고, 편한 곳도 좋았다. 어떤 환경이든, 어떤 내가 되든, 결국 그 안에서 나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여행이구나. 정해진 나 하나에 나를 가두지 않고, 환경마다 필요한 내가 되어가는 것. 그게 진짜 나일지도 모른다.
[소개글] 서성구는 만 28세로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전역 후, 2024년 7월부터 세계여행을 떠났다. 이집트, 아프리카 케냐, 유럽을 거쳐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한 그는, 현재 미국 자전거 종주를 준비 중이다.
매주 연재되는 '성구형의 세계여행'은 서성구의 모험과 도전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각 에피소드는 조금은 긴 글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