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던 흑인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쏨 머니?”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어봤다. “기브 미 쏨 머니”. 아, 제대로 들었구나.
케냐 나이로비에서 마타투로 6시간을 달려 엘도레트에 왔다. 다시 택시로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텐마을. 세계적인 마라토너들이 훈련하러 찾아오는 장소다. 드넓은 흙길을 따라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곳. 그만큼 사람도 적고, 건물도 적은, 시골 동네.
동양인이 신기했나 보다. 아이들이 계속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헬로우!”. 여행 중에 이미 많이 당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의 인사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너무 귀엽잖아! 나도 흔들흔들 인사를 건넸다. 까르르 웃으면서 떠난다.
그래 이곳은 케냐의 시골.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 그래서 놀랐다. 여기 아이들은 돈 달라고 안 할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경험하고 싶어 찾아온 이텐마을. 그러나 나의 시선이 첫 번째로 머문 곳은, 마을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가난이었다.
#발관리사 에반스
이텐마을에 도착하기 전, 엘도레트라는 도시에 들렀다.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킵초게의 이름을 딴 ‘킵초게 스타디움’이 있는 엘도레트는, 대형마트와 시장도 있는 나름 규모가 큰 도시다.
나의 목적지는 발마사지샵! 여행 중 계속 샌들만 신고 다녀서 뒤꿈치가 까매졌는데, 케냐에서 발마사지를 한 번 받으면 바로 하얘진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 이텐마을 전지훈련(?)을 시작하기 전 몸과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방문했다.
역시는 역시다. 무려 1시간 동안 진행된 새 발 만들기 대작전. 감자 채칼처럼 생긴 도구, 맷돌, 족집게 등을 거치고 나니, 시커멨던 나의 발이 아가 발이 되어있었다.
관리사의 이름은 에반스. 2002년생 월드컵 베이비다. 내가 이텐마을에 간다고 하니까 반가워했다. 본인의 고향이라고! 그래서 달리기를 좋아하냐고 물어봤는데, 그건 또 아니다.
에반스는 돈을 벌러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왔다. 대학에서는 엔지니어링을 전공했는데, 여러 이유로 지금은 발 관리사로 일하게 됐다고 했다. 해외여행 중인 나를 부러워했다. 케냐에서 해외 여행을 가는 건 부자만 가능하다면서, 나도 부자냐고 물었다. 전혀… 아닌데? 군대에서 1,000만 원을 모아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여전히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더라.
하루 전 일이 떠올랐다. 나이로비의 밤거리. 엄마와 아이들이 나와 있다. 키가 내 무릎 높이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아이들. 길을 지나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말을 건다. “기브 쏨 머니”.
#가난과 행복 사이
동정심인가? 혹은 그저 안타까움? 아프리카의 ‘가난’을 두 눈으로 목격한 순간, 나의 마음에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남과 나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보다 못한 이들과 나를 비교할 때는 어떨까. 솔직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난 건, 천운이었구나 하고.
출구 없는 삶이 있다. 배울 기회조차 없으니까. 혹은, 배워도 쓸 수가 없다. 저들이 노력이라는 단어의 가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뭐가 맞는 걸까? 하지만 발관리사 에반스가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출입문도 없는 작은 마사지샵에서 내 노트북보다 작은 텔레비전으로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상관없으려나. 가난이 본인 탓이 아니니까. 애초에 탓할 필요가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 가난이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고, 좋고 나쁜 건 상대적이니까.
지금 내 상황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도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볼 수 있으니까. 최소한 기회가 존재했고, 노력이라는 단어에 빚대 희망을 품고 살아가니까. 실제로 이루는 것도 가능할 거 같은데 말이야. 경쟁사회, 헬조선이라며 비판을 쏟아내지만, 이건 천운이 맞다.
그렇지만, 덕분에 나는 행복할까? 운 좋게 한국에서 태어나 이렇게 여행 중인 서성구가, 케냐의 발관리사 에반스보다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가난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나에게 큰 의문을 남겼다. 내가 꿈꾸는 '성공'이나 '행복'이 정말로 절대적인 가치일까? 이텐의 사람들은 나와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진 삶을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졌던 목표와 불안이 이곳에서 무색해진다. 나는 이 여정 속에서 정말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소개글] 서성구는 만 27세로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전역한 후, 2024년 7월부터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1,000만원의 예산으로 대륙별로 한 달씩, 총 1년 동안 각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도전과 경험을 쌓고 있다. 여행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스탭, 봉사활동 등의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순례길 걷기, 마라톤 참가, 히말라야 트레킹 등 여러 챌린지에도 도전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성구형의 세계여행'은 서성구의 모험과 도전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각 에피소드는 조금은 긴 글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