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랑 카드. 그리고 인터넷이 되는 휴대폰.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뭐든 해결될 줄 알았지. 아는 게 없어도, 계획이 없어도, 말이 안 통해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
맞는 말이긴 하다. 여행 난이도가 높기로 소문난 이집트의 카이로. 이곳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이긴 하더라. 실제로 아는 것도, 계획도 없던 나는, 지나가는 현지인을 붙잡고 많은 것을 부탁했다. 길도 물어보고 아랍어로 전화도 대신 받아달라고 하고. 모두 나를 친절하게 대해줬다. 대부분의 이집트인이 이렇겠지. 본인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굳이 이방인을 막대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왜 카이로의 이미지는 좋지 못할까? 아마도 ‘여행객’으로 마주한 카이로의 단편적인 모습이, 카이로 전체의 이미지를 대변하기 때문인 듯하다. 불친절한 가게 점원들, 호시탐탐 관광객을 노리는 호객꾼, 외국인만 보면 바가지를 씌우려는 택시 기사들까지. 결정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 ‘인샬라’.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또 한 신의 뜻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문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호텔 정전
길거리에서 만난 이집트 친구의 도움을 받아 호텔 체크인에 성공했다. 다합에서 8시간을 밤새 달려 카이로로 넘어왔기 때문에, 첫날 숙소는 좋은 곳으로 선정. 하루에 4만 원짜리 방인데 근처 다른 숙소가 하루에 1만 5천 원 정도다. 온전한 휴식을 위한 투자였다.
방에 들어갔다. 불이 안 켜진다. 소문으로만 듣던 정전. 괜찮다. 전력이 부족한 이집트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 호텔에도 적용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괜찮다. 카운터에 물어보니, 1~2시간 후면 복구된다고 한다. 물은 나오기 때문에 일단 샤워를 하고 낮잠을 청했다.
기상. 아직 불이 안 들어온다. 분명 낮잠을 2시간 잤는데…? 카운터에 다시 물어보니 진짜 1시간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한다. 오케이.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전등이 없어도 밝으니까, 그간 미뤄왔던 여행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안 괜찮다. 너무 덥다. 낮잠을 잤던 침대엔 땀이 흥건하다.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이집트에서 에어컨이 안 나오는 건 치명적인 문제. 어쩔 수 없이 리셉션에 내려가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비상 전력기를 가동한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되었다. 결국 체크인에 성공한 시간은 밤 10시. 정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카운터에 가서 여러차례 요청을 한 끝에 불이 들어오는 특실로 방을 옮겼다.
그렇다. 이게 바로 인샬라. 정전이 되고, 해결 방법이 없고, 고객의 끝없는 요구 끝에야 조치를 해주는 이곳은 바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아마 나의 직접적인 요구가 없었다면 정전된 방에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국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기다리면 해결해 주니까. 호텔이 정전됐는데 밤 10시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호텔에서 모르는 척을 한다? SNS에 오르는 순간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그러나 여기는 한국이 아닌 이집트. 이 모든 게 당연한 곳이다.
#호객 천국
첫날 신고식을 제대로 치른 뒤, 다음날 밖으로 나섰다. 숙소가 이집트의 상징인 피라미드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가볍게 주변 분위기를 느껴볼 예정이었다.
쉽지 않다. 두리번거리는 동양인을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다부진 체격, 근본 없는 민소매에 선글라시까지. 분명 말을 걸기 힘든 비주얼인 나였지만, 카이로 호객꾼들에겐 그저 먹잇감일 뿐이다.
1분에 한 명씩 말을 건다. 말만 걸면 괜찮은데, 졸졸 따라다닌다. “Where are you from?”이라는 물음에 “From Korea!”라고 답을 하는 순간 게임 끝. 현란한 스몰토크를 시작으로 어느 순간 가게에 들어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거리가 아니더라도 동일하다. 마트에 가서 물 한 병을 사는 것에도 흥정이 필요하기 때문. “How much?”, “One hundred(3,000원)”. 현지인들에겐 300원에 판매되는 1L짜리 물 한 병이, 여행객에겐 VIP 가격으로 훌쩍 뛴다.
이집트의 문화. 여행객을 끝까지 호객하고, 최선을 다해 높은 가격을 받아내는 것이 이곳에선 미덕이라고 한다. 300원짜리 물을 3,000원에 팔아내면, 이것은 신이 준 선물. 한국인으로 가득했던 다합을 떠나 처음으로 마주한 이집트의 본모습. 초보 여행자인 나에게 카이로는 혼돈 그 자체였다. 아, 정신없다.
[소개글] 서성구는 만 27세로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전역한 후, 2024년 7월부터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1,000만원의 예산으로 대륙별로 한 달씩, 총 1년 동안 각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도전과 경험을 쌓고 있다. 여행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스탭, 봉사활동 등의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순례길 걷기, 마라톤 참가, 히말라야 트레킹 등 여러 챌린지에도 도전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성구형의 세계여행'은 서성구의 모험과 도전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각 에피소드는 조금은 긴 글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