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없던 일정이 시작됐다. 카타르에서 튀르키예로 넘어 왔는데, 다음 비행기까지 약 12시간이 남아있었던 것. 어차피 이스탄불 공항에서 사비하 괴첸 공항으로 이동해야 했다. 단순하게, ‘12시간이면 이동하기에 충분하네’ 라고만 생각했었다.
12시간이면 이스탄불 시내를 구경하고 공항으로 돌아가기에도 충분한 시간. 그런데 솔직히 귀찮았다. 전날 잠도 못 자고, 손에는 20kg 캐리어, 등에 10kg 백팩이 있었다. 그래서 사비하 괴첸 공항으로 바로 가는 버스를 타려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나중에 다시 오겠지만, 그래도 뭔가 아까웠다. 그래서 이스탄불 '탁심'행 버스를 탔다..
어쩌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까. 첫째,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았다. 어디로 어떻게 갈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둘째,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았다. 경유지였고, 항공권 발매 후 탑승까지 너무 바빴다. 마지막으로, 하나하나가 과제였다. 대중교통을 타고, 환전을 하고, 새로운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 이 모든 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여기가 한국이라면 서울역에서 한강 들렀다가 김포공항으로 가는 일정일 터. 그러나 여기는 튀르키예였다.
#이스탄불 탁심 광장
탁심에 내려 처음 한 일은 걷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걷는 것을 잘한다. 계획이 없으면 걷는다. '도시를 둘러본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낯선 곳을 자유롭게 둘러볼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10분이 지나고 깨달았다. 20kg 캐리어를 들고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다행히 근처에 짐 보관소가 있었다. 캐리어를 맡기고 다시 걸었다. 배가 고파졌다. 노점상이 보였다. 빵에 누텔라를 바르는 것 같았다. 같은 메뉴를 파는 노점상이 광장에 4개 있었다. 가장 착해 보이는 상점에 가서 주문했다.
빵 하나에 얼마인지 물어봤다. '하우 머치 이즈 잇?'. 사장님이 메뉴판을 가리켰다. 가격은 하나당 10리라(한화 약 400원).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은 순간. 빵 하나를 입에 물고 다시 걸었다. 광장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람이 적은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걷다 보니 힘들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용기가 안 났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한 터키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헬로우". 아저씨는 길거리에 의자를 깔고 앉아 있었다. 나도 "헬로우"라고 답했다. 갑자기 공짜 커피를 마시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거절했다. 근데 거절을 거절당했다. 그렇게 길거리 의자에 앉아 터키 아저씨가 만들어준 종이컵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탁심 광장 뒷골목
세계여행. 그런 상상 한 번씩 해보지 않나.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 나 또한 여러 여행 유튜버를 보면서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첫 여행지에서, 정확히는 첫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상상이 현실이 됐다. 누가 봐도 여행자처럼 걷고 있는 까무잡잡한 동양인 남자애가, 누가 봐도 여유 넘치는 튀르키예 아저씨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아저씨는 가죽가방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이는 40대 후반. 가게 문을 열어두고 길거리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계시길래 사장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짧은 영어로 여러 대화를 나눴다. 몇 살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왜 여행을 하는지 등등. 당연히 새롭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지루할 정도로 다뤘던 대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30분 정도 같이 있었다. 한적한 길거리에, 의자를 깔고 앉아 마주보고. 30분 중에 20분 정도는 말 없이 있었다. 아저씨가 그닥 수다스러운 편도 아니었고, 영어를 못하는 나는 더욱 과묵해졌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튀르키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앉아있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치. 이들이겐 지금 모습이 그저 일상이니까. 나는 타인의 일상을 경험하러 떠나온 거니까.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아저씨의 가죽가방 가게에 들렸다. 꽤나 괜찮아 보이는 가죽 힙색이 있었다. 가격은 약 40,000원. ‘살까…’ 고민하다가 나는 가난한 배낭 여행자란 사실이 떠올랐다.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어느새 튀르키예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고,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출발 3시간 전에 도착했으니 시간은 넉넉하다. 탑승 수속까지 1시간 정도 걸리니, 들어가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역시 여행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공항 직원이랑 다투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
[소개글] 서성구는 만 27세로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전역한 후, 2024년 7월부터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1,000만원의 예산으로 대륙별로 한 달씩, 총 1년 동안 각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도전과 경험을 쌓고 있다. 여행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스탭, 봉사활동 등의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순례길 걷기, 마라톤 참가, 히말라야 트레킹 등 여러 챌린지에도 도전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되는 '성구형의 세계여행'은 서성구의 모험과 도전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각 에피소드는 조금은 긴 글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