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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성범죄 입법,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사설·칼럼·인터뷰

by sisaimpact 2025. 2. 1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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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대법원

성범죄에 대한 논의가 또다시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두고 여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본질적인 논의보다는 남녀 갈등 조장과 정략적 활용이 앞서는 모양새다.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해당 법안을 여성 보호의 필수 조치로 내세우는 반면, 반대 측은 무죄추정 원칙 훼손과 악용 가능성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형법의 기본 원칙과 사회적 신뢰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인 성범죄 방지를 이루는 균형 감각이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주장하는 측은 현재 강간죄의 구성 요건이 ‘폭행 또는 협박’으로 규정돼 있어 피해자 보호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피해자가 강한 저항을 하지 않으면 ‘합의된 성관계’로 간주되는 현실에서, 법이 성범죄의 실상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따르면 2022년 접수된 강간 사건 중 62.5%가 폭행·협박 없이 발생했다. 그러나 법적으로 강간으로 인정받으려면 피해자는 저항의 흔적을 입증해야 한다. 이는 피해자가 ‘진짜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성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형사법의 근본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형법은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무죄추정과 증거재판주의를 지켜왔다. 성범죄에 대해선 예외를 둬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원칙에 예외가 생기는 순간 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 성범죄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입증이 어려운 반면, 그만큼 무고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피해자의 진술이 곧 증거로 간주되는 현재의 실태를 감안하면, 무죄추정 원칙이 약화될 경우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  

최근 대법원 판례 변화도 주목할 부분이다. 6년 전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해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쉽게 배척하지 말라는 판결을 내놨다. 그러나 올해 초 천대엽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판결에서는 "범죄사실이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되지 않으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명확히 했다. 이후 성범죄 사건에서 무죄 판결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성범죄는 반드시 근절돼야 하지만, 법적 원칙과 형사사법의 신뢰를 훼손하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 논의가 필요하다면, 무죄추정 원칙과 법체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를 남녀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행태는 지양해야 한다. 성범죄 문제를 정략적 대결 구도로 변질시키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어렵게 하고, 결국 실효적인 대책 마련에도 걸림돌이 될 뿐이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말이 있다.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시기에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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